민망히 여기시는 예수님
                      
마태복음 20 29-34

어느 나라 선교의 문을 연 한국인 선교사가 있습니다. 수 년 전 유학생 비자로 그 나라에 들어간 K 선교사입니다. 그 나라 수도의 빈민가에 첫 교회를 시작한 후 교회들을 개척하여 섬기고 있습니다그 선교사님이 그 나라로 가게된 간증입니다.
종가집 외 자식인 자신이 어릴 적에 교회에 간다고 부모님들이 많이 박해했었습니다. 그런 정도의 박해는 이겨내었습니다. 그런데 20 대를 지나 어떻게 살 것인가를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것인가는 확실해 졌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가 더 해결 되어야했습니다, 누구와 함께 그렇게 살 것인가 였습니다. 교제해 오던 친구와 결혼을 이야기했습니다. 그 친구의 부모님을 대면했습니다. 그 부모님은 한 마디로 거절했습니다. 교회의 집사들인데 거절할 뿐만 아니라 서른 살이 넘는 자신에게 큰 모욕까지 주었습니다. 자살을 계획했지만 하나님은 그 젊은이를 특별히 부르셔서 그 나라에 선교사로 보내셨습니다.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 저희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저희가 예수를 쫓으니라.”(34)“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 민망히 여기시는 예수님입니다.“민망히 여기다창자가 끊어질듯하다에서 나온 말입니다. 창자가 끊어질 듯한 느낌입니다. 흔히 마음으로, 가슴(Heart)으로 느끼는 감정입니다. 전 존재로 긍휼히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민망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시자 사람이셨습니다.

예수님이 누구를 향해 그런 마음과 느낌을 가지셨는가요?
소경 둘이 길가에 앉았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듣고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니”, 30절입니다. 길가에 앉은 두 소경입니다. 그 소경들을 향해 민망히 여기신 주님입니다. 소경이라는 신체적 장애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다른 사람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감사는 전혀 없이 그냥 누리고 있는 축복, 그 축복은 눈으로 보는 축복인데 그 복이 없는 소경들입니다.
눈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보되 안경 없이 보는 것은 더 큰 축복입니다. 저도 미국에 유학 올 때는 안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사실 어린 학생 때는 안경쓰는 것이 부럽게 여겨질 때도 있었습니다. 안경을 쓰니 참 공부 많이 하고 또 공부 잘하는 사람 처럼 보이니 좋지않은가그런데 막상 안경을 쓰고 보니 불편하고 귀찮 을 때도 많습니다. 보되 안경을 쓰지 않고 보는 것에 감사합시다. 그리고 안경을 쓰고 볼지라도 볼 수 있음에 감사합시다. 진정한 행복은 우리에게 있는 것,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 그런 것들을 그냥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을 때 가능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복임을 인정하고 감사할 때 그 감사가 쌓이고 쌓이면 진정한 행복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두 사람의 소경을 보시고 민망히 여기셨습니다. 두 소경이 예수님을 보지는 못하지만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말만 듣고라도 큰 소리로 웨칩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예수님은 못 고치는 병이 없다는 소식을 이미 들은 소경들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이 불쌍히 여겨주셔서 고쳐주시기를 바랬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미 예수님에게로 몰려들었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은 소경들이 예수님을 향해 불쌍히 여겨주세요 하고 웨치지 못하게 했습니다.“꾸짖어 잠잠하라 하니", 입 다물지 못해, 조용히 해!, 많은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그렇게 나무란 것입니다.
두 소경들은 소경된 것만도 서럽고 힘든 데 예수님을 향해 고쳐달라고 소리도 못지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두 소경은 물러나지 않았습니다,“더욱 소리질러입니다. 예수님께 나아오는 데 방해되는 세력을 물리쳐 이겨낸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에게로 나아오지 못하도록 막는 방해였습니다. 그 방해 세력을 이겨낸 것입니다. 그랬을 때 예수님이 민망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이 마음으로 불쌍히 여기신 것입니다.“더욱 심히 소리 질러”, 마가복음 10장 48절은 그들이 더욱 "심히" 소리를 질렀다고 증거합니다. 곧 두 소경의 믿음입니다그 믿음을 보시고 예수님이 민망히 여기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믿음 생활에는 시험꺼리나 방해 세력이나 어려움들이 계속해서 몰려옵니다. 그럴 때 물러서거나 포기하지 않아야합니다. 두 소경들 처럼 물러서지 않아야합니다.
때로는 귀에 들려오는 소리나 말들이 믿음을 방해하는 세력입니다. 세상 불신의 소리입니다. 우리가 듣는 대부분의 소리는 사실 Gossip들 입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이야기들입니다. 그것이 좀 지나치면 험담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보다 못해야하는 데 나을 경우 그대로 봐주거나 지나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타락한 본성입니다. 사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할 때 하나님이 들려주신 말씀을 잊은 것은 아닙니다,“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2:16-17) 그런데 마귀가 이렇게 그들을 유혹했습니다,“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3:1-5) 아담과 하와는 그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귀의 꼬시는 말을 물리쳐 이겨내어 듣지 않아야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마귀의 말이 더 크게 들려지고 더 좋게 생각되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그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 못한 것입니다. 믿음은 Gossip들을  Gospel, 곧 복음으로 막아내는 힘입니다. 나아가 복음으로 바꾸는 힘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이 믿음의 방해되는 세력입니다.“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입니다. “보암즉도 하고”, 그렇습니다, 보거나 보이는 것이 믿음의 방해 세력이 되지않도록 영적인 눈이 밝아지는 것입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 처럼 영적인 눈이 밝아져서 예수님을 보는 것입니다.
생각이나 감정이 믿음에 방해되는 세력일 때가 많습니다. 생각과 감정이라는 것은 그대로 가만히 두면 대부분 마귀의 꾐에 넘어가는 도구로 사용됩니다. 성령 하나님이 생각과 감정을 다스려주시도록 말씀 붙들고 기도해야합니다.

예수님이 누구를 민망히 여기셨는가요? 믿음에 방해되는 세력을 이기고 예수님에게로 나아온 소경들입니다. 예수님으로 부터 응답을 받아야겠다, 예수님은 반드시 응답해주신다, 그런 기대와 소망과 확신으로 예수님을 향해 더욱 큰 소리로 웨친 소경들입니다. 예수님은 그 소경들을 만져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만져주심은 곧 사랑과 기적의 터치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고쳐지는 기적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사랑의 기적입니다. 눈을 뜨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언제든지 소경과 같이 장애물을 이기고 예수님께 나아오는 사람들을 만져주십니다. 고쳐주십니다. 일으켜 세우십니다. 힘에 힘을 더해주십니다.격려해 주십니다. 회복시켜주십니다. 생명과 기쁨을 만끽하는 행복자로 살게 하십니다.

어제가 올해의 추석이었습니다. 한인들은 어디에 살든 추석에는 고향을 생각케 됩니다. 한국 사람들의 가슴 속에 고향이나 향수, 조국애를 일으키는 공통적인 노래가 있습니다. 아리랑 입니다. 한국의 대표적인 아리랑은 세 개인데 강원도 정선 아리랑, 호남의 진도 아리랑, 그리고 영남의 밀양 아리랑입니다. 그런데 그아리랑이 무슨 뜻인가를 연구한 학자가 있습니다. 명지대학교의 노남섭 교수입니다. 그 교수에 의하면 아리랑은 아리이 합쳐진 말입니다.“아리아리 아리, 아리송처럼 확실히 있기는 한데 분명치 않는 무엇입니다. “신랑, 화랑처럼 최고의 것을 부를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아리랑드러낼 수는 없지만 가장 고귀하고 아름답고 신성한 이상향에 대한 간절한 바램, 그것을 향해 함께 가자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가장 고귀하고 아름답고 신성한 이상향이 과연 무엇인가요? 예수님입니다. 왕이신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는 것입니다. 민망히 여기시는 예수님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나아올 때 언제나 안아주시고 품어주시며 모든 것을 다 이기고도 남는 은혜와 능력을 주시는 목자이십니다. “신성한 이상 향인 예수님께로 함께 나아갑시다. 두 소경 처럼 방해 세력을 이기고 항상, 어느 곳에서든지 예수님에게로 나아갑시다. 함께, 같이 나아가십시다. 예수님이 민망히 여겨주십니다. 예수님의 민망히 여겨주심이 우리의 만족 이고 행복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