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도 좋아 ~~ 황홀한  성령행전: 사도행전 16 큐티

 

요약) 이방 선교에 불붙은  바울이 성령님이 여시는대로

따라가며 더베와 르스드라에서 형제들에게 칭찬 받는 디모데를 만나

그에게 세례를 주고 여러 성을 다녀갈 여러 교회의 믿음이 굳어지고 수가
날마다 더해지다.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전함을 막고 마게도니아로  우리를 도우라는
환상을 보고 강가에서 자주장사 루디아를 전도 집이 세례받다.

점쟁이 여종에게서 귀신을 쫒으니 주인들이 화가 바울을 때리고 옥에 가두게함,
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니 옥문이 열리니 간수가 죄수들이 도망한줄 알고
자결하려다  곳에 잇는 바울과 실라를 보고 집안이 세례받고

놓아 주려하니 그제서야 로마시민임을 밝히니 둘이 옥에서 나가 루디라의
집에 들어가 형제들을 위로하고 가다

 

묵상)

 

비록 바나바와 다투고 실라를 택하여 선교 여행을 떠난 바울이나  정말로 복음 전파의
선교만은 목숨을 걸었다.  말씀을 전할 때에 순전한 마음으로 아멘하고 믿는자가를 만나
셰례까지 주며 집안 식구들마져 예수님 앞으로 돌아오는  것이 볼모지인 선교지에서
생명을 걸을 만한  흥분의 동기로 충분하다.

 

허나 영혼을 거두어 들이는 기쁨엔 만큼 값을 치루게 된다.  아무런 물질적인
손익이 상관이 없을 때에는 몰라도 생계에 위협이 되는 자를 가만둘리 만무하다.
점쟁이 여종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라며 계속 소리를 질러대니 바울이 자가 사로잡힌 귀신을 그에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하여 쫒아 버리니 귀신이 버려 그야말로  점쟁이의 신통력이
없어져 여종이 쓸모가 없어지니  손해본 주인들이   
화가 나서 사람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실라를 온 무리가 송사하니 옷을 찢어 벗기고 때리고 옥에 가둔다.
그런데도 옥에 갇혀서도 기뻐서 찬양 예배를 드리니
다른 죄수들도 듣는데
홀연히 지진이 나서 옥문이 열린다.

 

죄수들이 달아난줄만 알고 자결하려던 간수를 바울등이 말리니 그 간수의 식구들이
다 셰레받는다. 
그런데  평안이 가라 날이 샜을 때 가라하니 그제서여 로마사람임을 밝히는 바울이다. 
매를 맞기전에 로마사람임을 밝히었다면
그렇게까지 모질게 고생을 하지않고 나왔을 것을,
바울이 간수가족들이 셰레받고 돌아오게할 성령님의 의도를 알았는 것 처럼 ,
아니면 간수의 가족들을 구원하고파서 자신이 모진 매를
맞는 희생을 감수하며 간절히 성령께 기도하며

영혼 구원의 열정에 매진하는 그 모습이  한 곳만 보고 바라보고  달려가는

바울의 외골수 선교 헌신에서  전심으로 하나님사랑, 영혼 사랑의 모델을 본다.

 

만나는 모든 사건 하나 하나에서 성령께 의지하며  부어 주시는 지혜를 따라

자신의 안일에는 안중에 없고 오직 영혼 구원에 매진하는 열정적인 사명자의

모습이다. 

 

나는 지금 어떠한가?   바울처럼 예수님을 사랑하며 영혼구원에 매진하던

나의 초심은 그대로 인가?  모진 세월 풍파에 퇴색하지는 않았는가?

자주 주위 형편을 보며  재미없는 환경 묵상에 걸려 넘어져 실망하고

이래도 사명자로 살겠는가?  그만 다 내려놓고픈 유혹 묵상과 자주 마음을 빼앗기는 
쓴 마음에  앉아 아파하는 나를 보며 피곤한 마음을 걷고 다시 일어나

주의 길을 달려 가자고  마음을 달랜다.

 

과연 내가 영혼을 사랑하는 초심을 내려놓고 먹고 자는 것에 만족해하는 세상사람으로
살 수 있을까? 40년을 달려온 사명길에 바람이 불고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는 일이 있다해서
도중하차할 수 있을런가?  답은 하나이다.

감옥에 갇히면 필히 기적을 통해 간수장 가족이 구원받듯이  나의 환란이

어느 영혼들을 구하는 도구가 될른지? 눈을 뜨고  나의 갇힘에 연류된  간수의 역을
하는 자가 믿음의 파산을 나로 인해 하지않고 오히려 기대못한  구원받을 심령임을
기대하며 아픈 내 마음은 뒤로 하고 오직 복음의 진보를 위해 믿음의 발길을 디뎌야
하지않겠는가?   새로이 바울의 헌신을 나의 옷으로  입는다.

 

기도)

 

사랑의 주님~~

 

한 영혼이 구원을 받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지요. 어찌 구원해 주신 저입니까? 
평생을 당신께 전부로 드린다해도 가치가 모자를 황홀한 구원입니다.        

바울이  죽어도 좋다고 생명을 초개같이 여기고  끌어안은 복음입니다.

 

죽으나 사나 주님,

먹는 것도 자는 것도 주를 위하여,

나는 죽고 그리스도만, 

 

무슨 긴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구원받고 그 날로 주님을 쫒아 나선지 40년입니다.

지난 온  사명자의 길 돌아보면 많은 산과 골짜기 구비 구비 넘었지만

하나님이 살아계시어 바울과 같이 많은 이들 예수님께로 돌아 오는 것

많이 보았고 그들을 이리 저리로 다루시며 키워 가시는 것도 보았습니다.

 

애기낳을 아팟어도 아이들이 커가는 것을 바라보는 재미에 해산하는
고통을 까맣게 잊듯이  허다한 아픈 기억들을 많이도 기억속에서 지워 주셨습니다.

그져 성숙의 발길을 디딛는 모습을 바라보며 기뻐하는 하늘 아버지의 심정을

품게된 것이 얼마나 놀라운 내게 일어난 기적인지요.

 

주님의 아픈 심장을 소유케됨이 오늘의 나된 은혜가 내게 족합니다.

세상 끝날까지 바울같이 달려갈 길을 다 마치고 주님께 큰 상 받으렵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소중한 신부로 살아 내리라 다시 성령님을 의지하며 다짐합니다.

 

“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아멘 아멘

 

이희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