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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법, 최고의 인생(2010.8.29) / 야보고서 2장 1-13절
6년 전에 저가 지금 사는 곳으로 이사를 왔습니다. 이사를 온 후에 히스패닉에 대한 생각이 바꾸어지고 있습니다. 저가 이사를 오기 전, 그리고 남미의 나라들에 단기 선교를 다녀오기 전에는 그들을 무식하고 거칠고 경계해야할 대상으로만 보아 온 것이었습니다. 목사인 저가 그들을 그렇게 본 것은 부끄러운 일이었습니다. 저가 사는 집 주위에는 히스패닉들의 집이 많습니다. 물론 그들의 교육이나 문화의 수준이 저가 이사를 왔다고 해서 저가 본받을 정도로 바뀌었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주말이면 그들의 음악 소리가 크게 들려온다든지, 옆집으로 부터 쓰레기들이 저의 집 앞으로 굴러오는 것들은 저의 감 정이나 자존심을 순간적이지만 흐트리기도 합니다. 그런 중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 있습니다, 저들이 바뀐 것이 아니라 저들 에 대한 나의 생각이 조금씩이나마 바뀌어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들은 이해하고 사랑해야 하며 궁극적으로 복음을 전할 대상이라는 다짐이 점점 커져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만일 경에 기록한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한 법을 지키면 잘 하는 것이거니와 “, 오늘의 말씀, 8 절 입니다. “최고한 법”입니다. “최고한 법”은 문자적으로 “왕의 법, the Royal Law”입니다. 로마 황제의 법입니다. 야고보서는 로마 제국 때 기록되었습니다. 로마 제국의 때 로마 황제가 만든 법은 바꿀 수 없었습니다. 절대적인 법이었습니다. 만약 로마 황제의 법을 바꿀 수 없다면, 왕 중의 영원한 왕이신 하나님이 만드신 법은 그 어느 누구도 영원히 바꿀 수 없다, 그것이 야고보가 “최고한” 이라는 말을 사용한 이유입니다. 그 어떤 법과도 비교할 수 없는 탁월한 법이 “최고한 법”, 곧 하나님이 주신 말씀의 법이라는 것입니다.
이 “최고한 법”이 무엇인가요? 8절이 가르쳐줍니다,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입니다. 이 말씀은 구약 레위기 19 장 18절에서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주셨습니다. 예수님도 그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증거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 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7-40) 우리가 우리의 몸을 사랑하 는 정도로 라도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같이 “크고 첫째되는 계명,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는 말씀입니다. 곧 성경 전체의 요약이 두 가지인데 하나님 사랑과 사람 사랑입니다. 야고보는 그 둘 중에서 이웃 사랑을 "최고한 법"이라고 강조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최고한, 크고 첫째되는 법을 이루면 곧 최고의 인생입니다. 하나님이 영원히 인정해주시는 최고의 인생입니다.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가 하나님이 영원히 인정해주시고 영원한 상급을 주시는 최고의 인생을 살아가기를 간구합니다. 그럴 때 우리 교회도 최고의 교회로 하나님이 드높여주실 것을 확실히 믿습니다.
이 “최고한 법”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천해갈 수 있는가요? 먼저 편견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도우심, 말씀의 힘, 그리고 기도로 함께 편견을 극복해내는 성도들로 전진하는 것입니다. “내 형제들아 ,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1절입니다.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외모로 취하는 것이 곧 “편견, 偏見, Prejudice, the Biased Viewpoint”입니다. 외모를 보고 느껴지는 나의 감정대로 사람을 판단하여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편견입니다. 그리스도인, 성도는 누구인가요? 편견을 극복하여 이겨내는 사람들입니다. 교회는 어떤 곳인가요? 편견이 죄임을 인정하고 편견을 극복하기 위해 함께 기도하며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야고보는 야고보서라는 성경을 읽는 사람을 “내 형제들아” 라고 부릅니다. 야고보와 함께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받은” 사람들이 성도라는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읽고 듣는 우리가 야고보의 “형제 자매들”입니다. 그런데 야고보서를 처음 받았던 교회에 어떤 일이 있었는가요?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교회에 오는 사람들을 차별해서 대했다는 것입니 다. 가난하게 보이는 사람보다는 부자로 보이는 사람을 더 우대했다는 것입니다. 외적인 형편이나 모양으로 판단해서 차별했다는 것입 니다.
좀 오래 전 미국 남쪽의 한 백인 교회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그 교회 가 있는 곳에 이사를 간 한 흑인이 주일에 교회를 갔습니다. 그 흑인이 들어가자 마자 그만 쫓겨났습니다. 백인 교회인데 흑인이 왔다고 편견한 것입니다. 그 흑인이 너무 속이 상해서 교회 계단에서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주님, 주님은 정말 백인 만의 주님이신가요? 주님의 교회라고 찾아왔는 데 이 교회에서 주님께 주일 예배를 드릴 수 없다니, 이거 너무합니다!” 그 때 주님이 응답하셨습니다, “서럽지, 너의 서러운 마음을 내가 잘 안단다, 그런데 너는 한번 쫓겨난 것을 가지고 뭐 그리 섭섭해하느냐? 나는 매번 쫓겨나는 걸!”
교회의 주인이신 예수님이 쫓겨나시는 교회, 어떤 교회인가요? 그 교회의 교인들이 편견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교회입니다. 교회의 주인이신 예수님의 마음과 말씀을 실천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지 않는 교회에 주님이 계실 수 없다는 뜻입니다. 저와 우리들은 지금까지 믿음 생활을 해오면서 특별히 교회에서 편견으로 다른 성도를 대한 적은 없는가요? 외적인 형편이나 모양으로 판단해서 혹시라도 차별을 하지 않았는가요?
저는 우리가 예배드리는 이 미국 감리교회에 늘 감사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1997년 7월 말 경, 지금도 이 미국 교회를 섬기고 계시는 목사님을 찾아와 교회사용을 요청했습니다. 그 때 두 말 없이 “선교하는 마음으로” 허락해준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면서 교회 사용료를 일년 동안 한달에 $50만 내라고 했습니다. “선교하는 마음으로” 로 도와준다는 말에 눈물나게 고마움을 느꼈습니다. 주님이 이 미국 교회도 더욱 크게 축복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 후 지금까지 참 좋은 관계를 유지해오는 것은 하나님의 큰 은혜입니다.
최고한 하나님의 법을 이루어드림으로 최고의 인생을 사는 길은 긍휼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13절입니다. “긍휼”입니다. “긍휼”은 이웃과 함께 느끼는 마음입니다. 특별히 어렵고 힘들고 아픈 이웃의 형편을 함께 느끼며 희생을 무릎쓰고 그 이웃을 사랑하고 도우는 구체적인 행동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은 가파르고 험했습니다. 그 길을 가던 한 사람이 강도를 만나 피투성이가 된 채 길 옆에 버려져 있었습니다. 그 길을 가던 그 당시의 종교인들인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얼른 못 본채 지나쳐 가버렸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아주 멸시 천대했던 사마리아 사람이 그 쓰러져 죽어가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얼른 달려가서 상처를 싸메주었습니다. 자기가 타고 가던 짐승에 태워 모텔로 옮겨 밤내 돌보아주었습니다. 다음 날 그 사마리아 사람 이 떠나면서 모텔 주인에게 부탁했습니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이 사람을 잘 돌보아주세요, 비용은 내가 감당하겠습니다. 예수님이 들려주신 이 비유를 듣고 영생을 질문했던 율법사가 대답했습니다, “그 사마리아 사람은 자비를 베풀었습니다, 참된 이웃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입니다, “너도 가서 그렇게 하라, 긍휼을 베풀라!” 긍휼은 “자비를 베푸는 것”입니다. 자신의 시간과 돈을 사용하며 생명의 위험까지도 무릅쓰고 강도만나 죽어가는 사람, 곧 힘들고 어려운 사람을 끝까지 도운 사마리아 사람의 희생의 행동이 긍휼입니다.
예수님은 긍휼을 베푸시고져 이 땅위에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아픈 사람, 외로운 자, 가난한 자, 귀신 들린자, 억압받는 자, 죄와 인생고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가는 모든 사람들을 한없이 민망히, 긍휼히, 불쌍히 여기신 예수님입니다. 마침내 긍휼을 온 몸으로 실천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나 같은 죄인의 모든 죄의 값을 대신 갚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이 흘려주신 피의 값으로 지불해 주신 것입니다. 그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니라.”(마5:7)
사랑하는 성도님들, 긍휼을 베푸는 이유입니다, 긍휼히 여김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보여진 하나님의 그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긍휼함을 입었기에 영생의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그리고 긍휼히 여기며 긍휼을 실천하는 것은 심판과 관계되기 때문입니다.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성경이 증거하는 이 심판은 영원한 부끄러움과 수치입니다. 그런데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 니라” , 긍휼을 실천하면 반드시 “자랑”, 곧 영원한 상급이 있다는 약속입니다.
대전 역 앞에 <성심당>이라는 빵집이 있습니다. 임영진씨가 사장입 니다. 그 분의 아버지가 이북에서 내려와서 1956년에 시작한 빵집 인데 아들 대에 와서 사업이 크게 번창되어가고 있습니다. 그 분이 아주 경쟁이 심한 제빵업에서 지금의 번창을 이루어가는 비결을 소개했습니다: 아주 큼직한 빵, 무제한 시식, 그리고 당일 팔다 남는 빵은 무조건 무숙자들에게 다 기부. 얼핏 들으면 한국에서 사업을 그렇게 하다가는 망할 것 같은 데 오히려 그런 일들이 많은 손님을 오게하는 선전 효과를 가져왔다고 합니다. 그 임영진씨가 자신의 삶을 이렇게 결론지었습니다, “빵으로 사랑을 나누어주어 <성심당> 이 먼저 대전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나아가 빵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키고 싶습니다.” 구체적으로 긍휼을 실천하는 그 분의 삶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에게도 세상을 변화시키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빵과는 비교할 수 없이 더 좋은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요? 긍휼 그 자체인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 찬송가 85장의 가사대로 예수님의 십자가 의 사랑을 다 받으셨지요? 믿으시면 “아멘”하십시다. 그 긍휼의 사랑 받았고 또 받고 있고 앞으로 ,영원히 받을 것이기에 그 긍휼의 사랑을 나누어주고 증거할 수 있습니다.
미국을 사는 한인으로서 기쁘고 감사한 일 중의 하나가 조국 대한민국의 발전에 관한 소식입다. 1973년, 10월, 저가 유학생으로, 미국 학생의 차를 타고 처음 J C Penny에 갔었습니다. S.C., 남쪽이기는 하지만 날씨가 쌀쌀해져서 소매 긴 셔츠를 사기 위해서입니다. 진열대위의 옷들을 보면서 어느 나라 제품인가를 살펴보았습니다, “Made in Korea” . 거의 대부분의 옷들은 다 그 표시였습니다. 운동화와 신발도 거의 다 “Made in Korea”였습니다. 큰 기쁨의 충격이었습니다. 요즈음 에짚트의 자동차 총 판매에서 “Made in Korea”, 현대 자동차가 거의 40%라고 합니다. 자동차 시장을 개척한 일본 자동차들은 도저히 “Made in Korea”를 따라 잡을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 나라에서 소위 성공 기준 중의 하나가 현대 자동차 소유라고 합니다. 에짚트를 비롯한 회교 나라들의 휴대폰은 거의 대부분 “Made in Korea”, LG나 삼성이라고 합니다. 회교 나라이기에 휴대폰의 버튼을 누르면 메카를 향한 방향 표시가 언제든지 선명하게 보여집니다. 그들은 하루에 5번 기도하되 꼭 메카를 향해 기도해야합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성도님들, “Made in Korea”와는 비교가 안되게 좋은 상표가 있습니다, 물론 “Made in Japan, Made in China, Made in Germany, Made in USA”보다 영원히 더 좋은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 표시가 무엇인가요? “Made in God”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에게는 “Made in 부모님”이 전부인가요? 아닙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신묘 막칙, Fearfully and Wonderfully” 하게, 영원히 완전하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셨습니다, 성도님을 그렇게 지으셨습니다. 창조주 참 좋으신 하나님이 영원한 아버지이십니다. 모든 피조물들 중에서 영원한 걸작품으로 지으셨습니다.
성도님은 그야말로 “명품”이십니다, 믿으시는가요?
그런데 “내”가 하나님의 명품이면 다른 성도도 명품입니다. 그 명품을 어떻게 편견으로 대할 수 있나요? 긍휼로 대해야합니다. 십자가 사랑의 긍휼을 받았으니 긍휼을 베푸는 것입니다. 그럴 때 더욱 하나님의 긍휼을 더욱 구체적으로 누립니다. 그 하나님의 긍휼이 곧 모든 것의 해결이고 해답입니다, 영원한 만족입니다, 그리고 영원한 기쁨이고 행복입니다. 성령께서 심판을 이기는 긍휼의 사람으로 살아가도록 도와주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