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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를 받는 복 / 마태복음 5장 4절, 고린도후서 1장 3-9절
위로를 받은 적이 있으시지요? 어떤 위로가 가장 크게 도움이 되었는가요? 저가 받은 위로가 있습니다. 언젠가 저의 세 아들들 중에 하나가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아빠, 내가 만난 여러 젊은 2 세들이 아빠로 부터 영적인 도움을 크게 받았다고 말해요, 아빠, 힘내세요!”그냥 스쳐 지나가는 사람이 건네는 한 마디의 친절한 말이나 한 행동이나 해맑은 미소가 위로가 됩니다. 친구나 동료나 성도가 건네는 따듯한 한 마디의 말이 마음에 힘이 됩니다. 가족으로 부터 받는 위로는 우리가 매일을 사는 데 필수품 처럼 귀합니다.
성경이 보여주는 우리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여호와여, 주는 나를 돕고 위로하심이니이다…어미가 자식을 위로함 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인즉…"(시86:17, 사66:13) 하나님은 구원해 주신 그리스도인들을 위로하시는 분이십니다. 성경의 우리 하나님 아버지가 위로자이시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로하신다, 그렇습니다, 위로자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 만큼 큰 복은 없습니다.“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고후 1:3) 이 말씀을 기록한 바울 사도는 복음을 전하면서 수 많은 어려 움들을 거쳐갔습니다. 그 때 마다 바울 사도로 하여금 모든 어려움들을 이기고 끝까지 믿음으로 달려가게 한 힘이 위로였다는 고백입니다. 믿음의 선배들을 위로로 승리하게 하신 하나님이 우리에게도 같은 은혜를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예수님이 들려주시는 복, 위로를 받는 복입니다.“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이 말의 뜻은 “옆에서 불러준다”입니다. 옆에서, 함께 있으면서 힘과 용기와 소망을 불러넣어준다, 입니다. 예수님은 성령님을“보혜사”라고 이름하셨습니다.“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요14:16) 보혜사 성령님은 우리와 영원토록 함께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보혜사”라는 말의 뜻이“옆에서 부른다”입니다. 곧“위로를 받을 것이다”와 같은 뜻입니다. 보혜사 성령님은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시면서 위로를 주셔서 늘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입니다.“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행9:31) 예루살렘 교회의 모습입니다.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갔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더욱 깊고 커져갔습니다. 그리하여 수가 더욱 많아졌습니다. 큰 축복입니다. 그런 축복이 어떻게 가능했는가요?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성령의 위로가 그런 복을 누리는 원동력이었습니다. 우리 교회에도 성령님이 그런 복을 더욱 크게 주시기를 간구합니다.“위로를 받을 것이요”,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를 받는 복입니다. 놀라운 복입니다. 이 복을 우리 모두 다 누리며 위로하는 위로자가 되기를 간구합니다.
누가 그 위로의 복을 받는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시는가요?“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나니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애통 하는 자”입니다.“애통”의 한문은“슬플 哀, 아플 痛”입니다. 슬프서 아프기까지 하다, 입니다.“애통”으로 번역한 성경의 원래의 뜻은“도저히 더 이상 감추거나 숨기거나 억누를 수 없기까지 전 존재를 강타한 슬픔으로 슬프하는 것, to grieve with a grief which so takes possession of the whole being that it cannot be hid, to lament, to mourn for the dead”입니다. 아마 사랑하는 가족이 갑자기 죽었을 때 느끼는 극한 슬픔의 감정입니다.
얼마 전에 타계한 소설가 박완서라는 분의 고백입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그 해에 26 세의 아들이 죽었습니다. 그 때 그 분이 겪은 어머니로서의 애통함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몇 달간 밥을 먹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원망했지요. 그러는 중에 한 가지를 깨달았습니다, 원망할 대상으로서의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감사함으로 애통을 극복했습니다.”남편과 자식을 잃은 한 여인의 슬픔과 아픔, 곧 애통입니다. 그런“애통”을 바라거나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할 수 있으면 그런“애통”이 없는 것이 모든 사람의 공통된 바램이고 소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애통하는 자가 복 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애통”도 그냥 한 두 번 하는 것이 아닙니다.“애통”의 원래 말은“현재 분사형”입니다. 계속된다는 뜻입니다. 계속해서“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입니다.
사실 우리가 사는 이 현세에는 이미 애통이 넘쳐납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그런 애통을 갖게합니다. 타락한 본성에 지배되어서 나쁘고 악한 일을 다른 사람에게 저지릅니다. 그런 일을 당한 사람의 애통이 큽니다. 독재자들이 있습니다. 한 사람의 독재자 때문에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이 애통합니다. 자신의 힘이나 능력으로서는 어쩔 수 없이 당하는 애통함입니다. 배 고파 죽어가는 사람들의 애통입니다. 고쳐지지 못하는 질병 때문에 당하는 애통입니다. 전쟁 때문에 당하는 애통입 니다. 그리고 자연의 재난 때문에 당하는 애통입니다. 일본이 그런 애통함을 겪고 있습니다. 인간 역사에 애통이 없었던 때는 없었습니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애통함이 있을 것입니다.
애통함 그 자체는 결코 복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사실“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 애통함이 복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이 세상의 가르침과는 정반대입니다. 특별히 현대를 사는 사람의 공통적인
소원은 즐김입니다. 짜릿한 느낌을 가져야 만족하고 행복해 합니다. 애통과는 아주 정 반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예수님의 말씀은 영원한 진리이고 사실입니다. 애통함, 그 자체는 결코 원하는 것은 아니지만 애통함이 없이는 참된 복을 누리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진정한 행복은 애통함을 거쳐가야 누리게 된다는 뜻입니다.
인간 역사에서 최고의 성자로 불리우는 성 프랜시스의 일생입니다. 그는 부잣집에 태어나서 아주 호화롭고 평탄하게 자라났습니다. 그런 그가 청년 때 중병에 걸려 죽을 뻔했습니다. 크게 애통해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때“왜 사는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그런 질문들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애통함으로 인해 던진 질문들이 프랜시스로 하여금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게 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애통하는 자가 누리는 위로의 복이 너무 컸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다 바쳐 그 위로의 복을 전하며 일생을 살았습니다. 그는 애통을 통하여 진정 영원한 복을 누린 것입니다. 프랜시스 뿐만이 아닙니다.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애통했기에 예수님이 약속하신 복을 누렸습니다. 그 복이 너무 확실하고 귀하기에 그 위로의 복을 증거하며 일생을 바쳐 살았습니다.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나니”, 영적으로 애통해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애통함입니다. 내 안에 있어서는 안될 것들이 있어서 나를 지배하고 다스리고 통치할려고 하기에 애통해 하는 것입니다. 그것들이 무엇인가요?“모든 불의, 추악, 탐욕, 가득한 악의, 시기, 살인, 분쟁, 사기, 가득한 악독, 수군 수군함, 비방, 하나님을 미워함, 불손함, 교만, 자랑, 악을 도모함, 부모 거역, 어리석음, 약속을 저버림, 무정함, 무자비함…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롬1:29-32) 그런 죄의 요소들이 내 속에 살아있음을 보기에 애통해 하는 것입니다. 은혜로 구원받았지만 아직도 타락한 본성이 내 속에 살아 남아 있어서 순식간에 고개를 쳐들고 일어나 나를 지배할려고 하기에 애통해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게 있어야할 것들이 없거나 너무 부족하기에 애통하는 것입니다. 있어야할 것들이 무엇인가요?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선, 온유, 절제…”(갈5:22-23) 내 속에 살아 있어서 나를 온전히 지배해야 할 성령님의 열매가 너무 약하고 부족하기에 애통해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온유함과 겸손함과 인내함과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내 속에 너무 부족하기에 애통해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흘려주신 그 귀한 피의 값으로 내 죄가 다 용서함 받았는 데 내 속에 예수님의 그 구원의 은혜와 사랑에 대한 감사와 감격이 너무 적기에 애통해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날마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라고 명령하셨는 데 십자가 질려는 마음이 너무 부족한 것을 보고 애통해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할려는 마음이 너무 없음을 알 고 애통해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은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사랑하여 그 말씀을 지킬려는 열심이 너무 부족하기에 애통해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믿음인데 순종 할려는 의지가 너무 약함을 보고 애통해 하는 것입니다. 내 속에 하나님의 영광을 제일로 여기고 하나님의 일을 제일 먼저 생각하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할려는 간절한 관심이 너무 적음을 알고 애통해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에게 그런 애통함이 있는가요?“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렇다면 반드시 예수님이 약속하신 위로가 넘쳐남을 믿습니다.
우리 모두는 다 위로가 꼭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위로는 모든 것을 다 이겨내고도 남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그 위로는 애통하는
마음이 누릴 수 있습니다.
“대저 나 여호와가 시온을 위로하여…그 가운데 기뻐함과 즐거워함과 감사함과 창화하는 소리가 있으리라…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사 51:3, 61:2-3) 애통해 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의 복 들입니다. 기쁨과 감사와 찬송입니다. 예수님의 영원한 영광에 참여함을 바라보기에 살아있는 소망으로 넘쳐나는 복입니다.
진정으로 애통해 하는 심령을 예수님은 반드시 주장하셔서 모든 고통이나 어려움들을 이기고도 남는 능력을 주시는 복입니다.“…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고후1:5-6)
바울을 승리하게 한 그 위로가 애통해 하는 우리에게도 넘쳐나서 모든 연약함과 아픔과 어려움과 고통을 다 이겨 승리하도록 성령님이 도와주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